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나라의 베트남 원정 (문단 편집) === 개전 이전의 상황 === 1258년에 다이 비엣에서는 이미 1258년에 쩐 태종이 태자 쩐 호앙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었고 쩐 호앙은 쩐 성종(陳 聖宗)이 되었다. 물론 쩐 태종은 태상황제(太上皇帝)로서 꽤 오래동안 정사에 관여했다. 몽골 제국의 침공을 막아낸 쩐 태종은 1277년에 사망했고 1년 뒤인 1278년, 지독하게 버티던 남송이 드디어 멸망하고 중원의 새 통치 왕조로서 [[원나라]]가 군림하게 되었다. 몽케의 동생이었던 쿠빌라이는 이제는 훗날 원 세조(元 世祖)라 불리는 존재가 되었다. 남송이 멸망할 시기, 원나라에 공물을 보내는 척 하다가 결국 무시하며 강경하게 대처했던 2대 황제 쩐 성종 역시 아버지처럼 자신의 아들인 쩐 캄(陳 昑)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 뒤, 자신은 태상황제가 되었다. 즉위한 쩐 캄은 훗날 쩐 인종(陳 仁宗)으로 불리게 된다. 쿠빌리아는 남송만큼이나 지독하게 저항하던 [[고려|고려(高麗)]]를 굴복시킨 뒤 [[가마쿠라 막부|가마쿠라 막부(鎌倉幕府)]]와 다이 비엣을 정복하기 위해 선박과 수군을 모으기 시작했다. 이전부터 다이 비엣의 군주에게 입조(入朝)를 명했지만 이래저래 핑계만 대며 나타나지 않자, 다시 한 번 다이 비엣에 사신을 보내 "친히 입조할 생각이 없으면 대신 학식 있고, 솜씨가 좋으며 재주 있는 이를 보내라" 며 압박했고 태상황제였던 쩐 성종은 결국 대신들 중 쩐 지아이(陳 遺愛)、레 묵(黎 目)、레 투안(黎 荀) 등을 사신으로 보냈다. 쿠빌라이는 다이 비엣에서 대신들을 보내오자 한술 더 떠서 다이 비엣에 [[다루가치|다루가치(达鲁花赤)]]들을 더 파견해 감독하려고 했으나, 황제 쩐 인종은 단번에 거절해 버렸다. 그러자 분노한 쿠빌라이는 입조 사신으로 왔던 쩐 지아이를 안남국왕(安南國王)으로 삼고 레 묵은 한림학사(翰林學士), 레 투안은 중서령(中書令)으로 임명한 뒤 1,000명의 병사를 쥐어주며 쩐 인종을 폐위시키고 즉위하라는 칙서를 내렸다. 하지만 사태를 눈치 챈 쩐 왕조에서는 당장에 군을 파견, 그들을 격파해 사로잡아 버렸다. 이 배은망덕한 세 사신은 도망갈 기회를 엿봤지만 결국 죄를 받아 쩐 지아이는 군사를 붙여 티엔즈엉푸(天長府), 레 묵과 레 투안은 통빈(宋兵)으로 유배를 보냈다. 한편, 다이 비엣의 재상(宰相)이었던 쩐 꽝하이(陳 光啓)가 다루가치를 접견하게 되었는데 해당 다루가치는 꼭두각시 황제를 세우는 데 실패한 것에 대단히 분개하는 모습을 보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